[내 인생 멘토 – 안홍배 부산대학교 교육부총장 편] 서울대 현정준 은사 [출처 : 부산일보 2015.2.10.]

학문에 대한 태도와 부정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신 분들학문에 대한 태도와 부정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신 분들1983년 부산 대학에서 개최된 한국 천문 학회의 때의 모습. 전부터 2번째의 왼쪽에서 3번째가 형· 존 교수 같은 줄의 제일 왼쪽이 안·홍베 교수.저희 집은 딸과 아내는 나를 “에이리언”라고 부른다. 내가 아주 특별한 캐릭터를 가졌다라는 것이지만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된 것? 되돌아보면 내 삶을 관통한 두축은 학문과 등산이었다. 대학 4학년을 마치고 생각한 것은 천문학과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문리대 산악회를 졸업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가장 열정적으로 지내던 학창 시절에 최우선 순위를 둔 것이 산악회 활동이었던 것으로 오늘의 나를 만든 멘토는 다름 아닌 “산”그 자체이며, 함께 등산을 한 문리대 산악회의 선후배들이다.학문은 등산과 같다고 했는가. 나는 등산을 좋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을 좋아했다. 특히 천문학은 제가 천문학을 하기 때문에 고교 3학년이 되고 문과에서 자연에 옮기고 진학할수록 하고 싶은 분야였기에 그 사랑이 각별했다. 대학에 와서 만난 나의 은사들은 한결같이 학문에 정열적으로 제자를 사랑했다. 천문학이라는 학문이 특별하니까인지 모르지만, 모두가 남달랐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천문학을 한다는 것은 별을 보고 살것이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천문학이 좋아하지 않으면 못 갈 길을 가신 분들이다.국내 천문학”대부”선생님, 모든 천문학자의 멘토인 개인적인 생활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교사들 중에도 특별한 것이 하나 있어, 형· 존 선생님이다. 서울대에 천문학과를 열고 이 땅에 천문학의 씨를 뿌린 후 수많은 제자를 키우고 우리 모두의 멘토가 되는 것이다. 저는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통해서 10여년을 선생님께 배운 것이기 때문에 천문학자로서 나의 인생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도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게 틀림 없다. 현 선생님은 평생을 학문만을 걸어오신 분이다. 선생님은 일상에는 상냥하고 말수도 적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척에서 선생님을 만났는데, 누군가와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학생들에게도 항상 따뜻한 관심을 보이며 누구에게나 부모 같은 편이었다. 유신 반대로 숨진 서울대 농대의 김·상진 씨의 49제를 앞두고 1975년 5월 22일 관악 캠퍼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고 김·선 인 추모 집회가 열렸다. 나는 산악회의 동기이자 친구인 김도연 씨의 비장한 성명서 낭독을 눈시울을 붉히며 지켜보고 있었지만, 몰려든 사복 경찰관들을 피하고 현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하루를 지내던 기억이 있다. 이 사건에서 수십명의 학생이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나도 현 선생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고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학문의 길에서 내가 만난 나의 스승들은 모두 학문의 열정만큼이나 학문에게 엄격했다. 내가 평생 학문을 사랑하는 매진하는 것도 나의 스승들이 학문에 목숨을 걸게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은사들은 학문의 열정은 한결같이 컸지만, 개성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는 누구에도 거리를 두지 않고 여러분의 개성이 달리 있었으므로, 나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역자 소개 현정 토시(현·존 준)서울대 교수(1927년 평양 태생).서울대 물리학과와 이 대학원 졸업.부산대 교수, 한국 천문학 회장 역임.미국 오하이오 주립 대학원 천문학과 교환 교수.서울대 자연 과학 대학 천문학과 명예 교수.쓴 책에 『 지구 과학 개론 』(공저), 『 별·은하·우주 』이 있고 번역한 책에 『 우주의 창조 』 『 아시모프의 천문학 입문 』 『 시간의 역사 』 등이 있다.[출처 : 블랙홀박사 박석재님 네이버 블로그] “학생에게는 은하수를 준 애연가” [출처 : 서울대 총동창회 사이트 (458호 2016년 5월] 스승의 날 특집 : 나를 키운 은사님을 그리며] 현정준 / 문리대[출처 : 블랙홀박사 박석재님 네이버 블로그] “학생에게는 은하수를 준 애연가” [출처 : 서울대 총동창회 사이트 (458호 2016년 5월] 스승의 날 특집 : 나를 키운 은사님을 그리며] 현정준 / 문리대민족일보 다시 읽기 <147>[서울대 문리 학부 부교수 형·존 준 씨] “손님 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교단 12년에 서재 거 생각도 못하다. 서재입니까?기본적인 기본 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무슨 서재를 갖는다는 거죠?이렇게 반문하는 서울 대학 문리 학부 부교수의 현 씨는 “집을 사는 것은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전세 한채 집이 좋은데…적어도 백만 환은 하므로 큰 이야기입니다.”교수 생활 13년에 어떻게 하면 서재를 마련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책만 꽂아 둔다고 서재가 아니라는 것은 쉽지 않다.연구실 안에서 세월을 보내다 학자들에게 별도로 연구비가 지급되는 것도 아니어서 쥐의 꼬리 정도의 급료로 생활비와 연구비를 모두 충당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소유의 주택을 마련한 축일은 생각할 수 없다는 현 교수이다.저서의 인세 같은 것도 없는 처지다. 연구 분야가 천문학이다”현”교수는 부산에서 서울 대학교에 전임되고 이후 3년 간동 숭동 소재 문리대 교수”합동 관사”에 어리석은 행동하고 있다.말이 관사에 불과하다-8.15전부터는 이공학부의 독신 교수들의 “아파트”이라 부엌도 없다. 8가구가 들어서고 있는 이”아파트”의 2층에서 “다다”미국”5장의 침실과 2평 넓이의 마루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이 작은 세계에도 나이가 인구 증가가 끊이지 않아 힘드네요. 하하하, 중에만 4식구인데.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딘가에 마중하는 자리가 없으면 안 됩니까?”부산에 있던 당시”현”교수는 빚을 하고 80만 환의 집을 산 적이 있었다고-게 곧 상경하게 된다 다시 팔리게 되는 원금과 이자를 갚으러도 부족했다고 고소한다.재직 10년 이후 퇴직하면 한채의 집은 살 수 있는 금액이 공제회로부터 급여된다지만 7,8년 후의 화폐 가치가 그것을 가능할지는 적으면-유감스러운 걱정일 수밖에 없다.오히려”현”교수는 자신의 집을 소유하거나 그것을 대대로 물리겠다는 것은 낡은 생각이라고 지적하고”이백의 봄 밤 사랑 도리 집 서문”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부천지자 만물 지역 레이.자 백 대지 과객 세상이 주막 같은 것이라면 주택에 대한 것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사실 땅은 좁은 것에 인구만 늘어나니 도시일수록”아파트”화되지 않을까. 한국 사정으로는 교수”아파트”가 대학에 병설되어야 합니다.이렇게 다짐하며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집을 남기고 줄 수 없다면 각각 특기와 배우고 있기 때문에 초등 학교 재학 중인 두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사서 줬다는 “현”교수는 포기한 것처럼 오히려 태연한 미소를 띄운다는 것이었다. (커트는 “현”교수의 서재”스케치”)(R기자)<민족일보> 1961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