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적지 않게 모험적인 일이지만 언젠가는 경험에 빗댄 내 글이 소재 고갈로 인해 생동감을 잃거나 멈추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면 이렇게 좋은 재료가 따로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현명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결정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싶다. 몇 년 전 처음 ‘녹내장’ 확진을 받은 뒤부터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보다 내게 남아있는 시간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기록들은 분명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공익의 목적이 담긴다면 소리가 작은 이야기라도 그 울림은 전해질 것이라 믿는다.
Glaucoma ‘그라우코마’
녹내장의 공식 명칭이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지만 어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드물다. Glauco는 접두사로 영영사전에 이렇게 표기하고 있다. gleaming(빛나다/밝다), silvery(은색), bluish-green(청록색), bluish-gray(청록색). 모두 색감을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는 많은 질병이 그렇듯 녹내장도 한자 표기법으로 사용하는데 청색(청색을 녹색)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파랗고 검고 아름답다 녹색 등을 나타내는 상형문자이다.
모든 의사가 대학 졸업식에서 오른손을 들고 외치는 선서로 유명한 ‘히포크라테스’는 노인에게 ‘실명’을 유발하는 질병에 대해 동공이 지중해 바다 색깔처럼 파랗게 변하면 시각이 파괴되고 결국 실명까지 이르게 된다며 ‘글래쿼시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눈앞이 흐려 보이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glauco’ 표현을 썼지만 검푸른 바다색이 아무리 멋지다고 해도 동양인으로 태어난 내가 지금의 브라운 아이즈를 내놓으면서까지 대체하고 싶은 색은 아니다. 다행히 녹내장은 그렇게 바이러스에 걸린 좀비처럼 갑자기 동공 색깔이 변하는 증상 등은 없다. 솔직히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평생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다소 촌스러운 발음이다. 그렇다고 ‘백내장’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나는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의미부여라도 하려고 한다. 독일어 ‘glau’는 사전적인 의미로, 밝다, 맑다, 맑다, 빛나다, (눈매가) 날카롭다, 총명한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절망적인 혼수상태를 뜻하는 coma와 붙는다면 놀랍게도 현실의 녹내장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Glaucoma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녹내장은 사람들에게 마치 전이된 암처럼 부러진 삶으로 인지되고 있다.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실명하고 마는 하늘의 잔인한 저주 정도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나의 투병기에 대해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 결정이 여기서 시작됐다. 비록 나는 의학계 또는 안과 전문의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그들과 달리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녹내장’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환자’의 입장은 그것을 글로 해도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이고, 이미 몇 년을 살아오면서 다시 반복하는 많은 해를 살아야 하기 때문에 무엇을 체험하게 되고 무엇이 중요한지 몸과 정신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무섭고 어려웠던 것을 나누는 것은 개인과 사회의 미래를 위해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녹내장’ 환자로서 글을 쓰는 의미를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코로나19와 비교해 설명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코로나19는 확진자로 판명되는 순간부터 모든 일상이 멈춘다. 타인과 세상을 전염시키는 모든 확률을 제거하기 위해 격리돼야 한다. 일정 기간 집중치료를 받고 격리 해제되는 순간 ‘일반인’의 세계로 재진입한다. 물론 후유증 또는 불특정 사유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녹내장은 코로나의 이런 현상과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감염자가 되는 순간부터 이후에도 타인을 전염시키거나 해를 끼치지 않는다. 여러 종류 중 급성폐쇄각 등 응급수술을 요하는 일부 경우도 있지만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수로 존재하는 개방각 녹내장 환자는 주로 안약 등 약물치료와 정기적 정밀검사 등에 의존하게 된다. 아무도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코로나19 격리 해제처럼 석방도 얻지 못한다. 다만 녹내장의 정확한 메커니즘은 현대의학에서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아 안압에 의한 시신경의 손상으로 시야 결손이 발생하는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만약 녹내장 감염자가 아니라면 의학적 지식만으로 또는 알려진 정보만으로는 이 질환에 대해 취하는 스탠스는 건조할 수밖에 없다. 한 녹내장 환자의 경험이 심장처럼 역동적이고 호흡하는 글로 기록되기를 바라는 정성을 담아 그런 마른 땅에 조금이라도 흩어지길 바라는 것이 내가 글을 쓰기로 한 이유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꼭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녹내장 감염자’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수치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은 실재하는 현실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10년 전 국내 녹내장 환자 525614명은 2015년 767342명으로 늘었고 이듬해인 2016년 809231명, 그리고 2019년 974941명으로 백만명에 달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현대의학에서 녹내장은 완치 불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특이하게도 2020년 자료에서는 7387명이 소폭 감소한 96755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고령환자 사망 집계분 및 기타 감소 요건이 증가폭보다 컸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로 추정하고 있다. 올해가 끝나고 2021년 데이터가 알려주겠지만 마치 멈춘 듯한 추이가 나에게는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매우 빠르게 급성장하고 있는 녹내장의학계의 어려움으로 잠재적 감염자가 자발적인 검사를 통해 나타날 정도로 밝혀져 멈춘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녹내장은 선천성과 후천성을 모두 갖고 있어 안심할 수는 없다. 검색의 번거로움을 조금만 더하면 ‘보건의료 빅데이터 개방 시스템’을 통해 누구나 추이를 조회할 수 있다.
보건의료 빅데이터 개방시스템: ‘녹내장’ 조회자료, 20210721 기준 필자는 2018년 11월 위 그래프 중앙에 있는 그룹의 일원으로 속하게 됐다.왓츠이밍치즈 like, 3년의 시간을 한 편의 발행으로 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나의 녹내장 라이프는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에도 현실이기 때문에 아마 담을 이야기 또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집중할 일만 가득하겠지만 독자 입장에서 장황한 서문은 고역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이후에는 에피소드로 나눠 독자의 눈과 귀에 잘 녹아들도록 힘을 빼고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 다시 읽어볼수록 짧지 않은 서문에 무게감까지 많이 실려 있는 것이 느껴지기에 지금까지 참고 읽어주신 모든 독자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더하는 말,
갑자기 녹내장 확진을 받게 되고, 묻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검색해 밧줄을 찾고 있다면, 또는 그런 사람이 주변에 존재한다면 내 말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빠를수록 좋으니 시력이 좋든, 눈 건강에 자신이 있더라도 정밀검사가 가능한 안과를 방문해 반드시 녹내장 검사를 받아볼 것을 권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