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에 끌렸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른 채 빌려왔다.몇 장 휙 넘기더니 천문학 관련 책이구나 딱딱한 책이구나 싶어서 책장에 며칠씩 갖다 놨어. 그러다가 조금 빈 시간이 생겨서 이 책을 손에 넣었다. 별 기대 없이.
프롤로그에서 빠져들었다. 그리고 프롤로그에서 심채경 박사의 붓놀림과 천문학에 대한 사랑이 잔잔하게 느껴졌다.
거리와 각도, 시차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달라붙어 모두가 보고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두 점을 칠판에 붙이고 돌아섰고, 이보다 흥미진진한 것은 없다는 표정으로 학생들을 바라보던 그 순간 무미건조한 중년 아저씨의 눈에서 반짝 소년이 지나갔다. 술이나 산해진미도 아니고 복권 당첨도 아닌데 그나마 아름다운 영주 씨를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연주의 시차. 지난 십여 년 동안 일년에 예닐곱 반에서 똑같은 설명을 했을 텐데 왜 연주의 시차 따위가 그 사람을 그렇게 즐겁게 하는지 너무 궁금했다. 1년 후, 저는 지구 과학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몇 개의 상을 수상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니 그런 귀여운 교수님들이 또 있었다. 퇴임을 눈앞에 둔 할아버지 교수에게 기본 천문학 강의를 들었다. 우리나라 천문학자 1세대에 속하는 분인데, 그해에도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여 천문학자가 아니라 조선시대 최고의 무관이라 해도 어울리는 분이었다. 그런 장수 같은 사람이 칠판에 별을 그리면 얼마나 작고 예쁘고 단정하게 그리는가. 나는 교수님이 별을 그릴 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속으로 키득거렸다.

귀여운 곳에서는 나의 지도교수도 만만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대학원생 제자들과 회의를 했다. (중략)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각각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보고를 마치면 교수님은 히죽히죽 웃으며 당신이 일주일 동안 한 일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중략) 마치 일주일 동안 그 순간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기뻐하며 랩 미팅의 마지막 발표를 장식했다. 대학원 시절부터 사용해 온 당신의 모델을 60세 이상 끊임없이 바꿔 고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저렇게 재밌게.

그런 사람들이 좋더라. 남들이 보기에 저게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에 신나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다툼을 만들어내지 않는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닙니다, TV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을 바꾸는 영향력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 수백 년이 걸리는 곳에 한없이 전파를 흘리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해.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 프롤로그 중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천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서는 정말 눈앞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지루하고 어렵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런 선입견을 조금 벗은 것 같다. 물론 전문적인 학술서적은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나처럼 선입견을 가진 사람도 천문학 역사에 대해 그리고 천문학 강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한 것은 심채경 박사의 글쓰기가 아닐까 싶다.

우주에 대해 설명할 때도 장황하지 않고 말투도 불필요한 미사여구 없이 깨끗하다. 하지만 딱딱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자신의 전문 분야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박사의 우주에 대한 사랑이 잘 느껴진다. 그래서 나 같은 문외한도 천문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연구 과제가 승인되지 않으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비정규직 행성 과학자. 돈도 못 버는 학문이라는 편견 속에서도 나날이 치열하게 살고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를 사랑하는 천문학자.
그래서 글 속에서도 위트와 자신만의 소신이 느껴진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서영에 대한 글과 존경하는 여교수에 대한 주변의 시선을 기술한 부분에서는 여성 과학자에 대한 여전한 편견과 차별을 볼 수 있다. 이런 부분을 말할 때도 과격하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조용하지만 날카롭게 말한다.
오랫동안 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멋진 일이기도 하다. 그런 걸 좋아하기만 한다면… 아니, 너무 좋아하니까 오랫동안 노력과 시간을 바쳐서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
게다가 이렇게 글씨까지 잘 쓰다니…
오랜만에 소장하고 싶은 책이 하나 더 생겼다.